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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주파수가 맞지 않을 때 새 나오는 잡음이 귀를 괴롭힌다. 붉은 막이 걷히자 그림 같은 수염을 단 남자가 고양이를 안고 등장한다. 다시 막이 닫히고, 시작하는 연극.
“내 모든 것은 상처이며 피투성이다. 나는 이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은 나에게 긍정을 향한 용기, 표현을 향한 무모함, 그리고 역설을 향한 본능을 주었다.” (에밀 치오란)
안헬리카 리델의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는 벨기에 엔티겐트 극장 상주 예술가이자 연출가인 밀로 하우가 기획한 아이폰 공인인증서 ‘연극의 역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스페인의 전설적 투우사 후안 벨몬테의 서사를 별치해 안헬리카 리델이 자신의 연극사를 써내려간 작품이다. 스페인 출신의 전방위 예술가인 그는 신랄한 자기 독백과 파괴적 행위로 직조한다.
이국적 색채의 작은 방이 등장하며 연극은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다. 원형 테 홈페이지제공 이블, 와인 한 병, 투명한 유리잔과 작은 의자. 붉은 드레스를 입은 리델은 의자에 앉아 유리잔에 와인을 따른다. 치마를 주섬주섬 걷자 하얀 다리가 드러난다. 소독약을 묻힌 솜으로 무릎을 쓱쓱 닦아내더니 면도칼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실처럼 가느다란 상처들을 만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리델은 말한다. “그 머저리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신용불량자 회복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전해, 투우는 영적인 의식이라고.” 투우에 필요한 것 ‘죽음을 갈망하는 것’뿐이라며 그는 노래한다. 이 도발적인 예술가는 투우를 말하며 자신과 투우사를 동일시한다.
다리를 따라 서서히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광기에 휩싸여 쏟아내는 대사 안엔 사회에 억압된 개인이, 예술이라는 거대 세계에서 몸부림치는 리델의 고통이 담긴다 캐피탈여성대출 .
“공포의 갈증, 전율의 갈증, 연민의 갈증,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픈 가망.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거든 기대, 그 이하야. 사람들이 왜 내게 박수를 치는지 나는 몰라.”
‘스페인의 분노’로 불리는 전방위 예술가 안헬리카 리델의 연극 ‘사랑의 죽 부채상환비율 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 [국립극장 제공]
지독한 자기혐오와 고뇌가 담긴 리델의 독백은 자기파괴의 연장 안에 있었다. 그것은 사회적 폭력으로 내면의 고통을 안은 개인들과 공유되는 정서다. ‘자해 퍼포먼스’라고는 하나 공포영화처럼 유혈이 낭자하고 피칠갑이 되는 연극은 아니었다. 놀랄 수는 있어도 불쾌감을 주는 수위는 아니었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리델의 광기와 마주하면서다. 스페인 여성 듀오 라스 그레카스의 ‘아싱가라’(Asingara)를 부르며 춤을 출 때마다 하얀 다리를 타고 붉은 핏줄기가 흘렀다. 새하얀 천을 다리에 가져다 대자 어느덧 천 조각은 붉게 물들고, 점점 더 많은 양의 피가 흐를수록 리델은 성난 소처럼 분노를 쏟아냈다. 그는 앞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면도날 퍼포먼스는 자해의 수단이 아닌 피의 맛, 피 냄새의 자극을 받기 위한 장치”라며 “피 냄새를 맡으면 제 몸에서 정신이 빠져나가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리델은 고통을 예술로 옮겨오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무대의 고통을 객석으로 전이하는 방법 역시 알고 있었다 거짓과 가짜 없이 진실성을 추구한 날 것의 무대는 ‘고통의 예술’로 기능했다.
리델의 무대엔 경계도 한계도 없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의 도구’로 삼아 자기의 이야기를 하되, 그 안에 종교, 사회 부조리, 성(性)을 언급한다.
‘스페인의 분노’로 불리는 전방위 예술가 안헬리카 리델의 연극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 [국립극장 제공]
흐르는 피를 빵에 묻혀 먹고,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살아있는 아기들에게 세례를 하는 장면은 기독교인의 리델의 종교관에서 기인한 희생과 구원 서사를 상징한다. 자기 피로 희생해 새로운 생명을 구원하는 연결고리가 두 장면 사이에 있었다. 팔과 다리가 절단된 남자를 끌어안은 리델의 모습 역시 예수와 마리아의 ‘피에타’를 재현한다. “매일밤 터키 자장가를 불러주고 랭보의 시를 읽어주겠다”는 자막이 뜰 때 그의 품안에 안긴 남자의 모습은 랭보와도 중첩된다. 랭보 역시 종양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이라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며 죽음만이 죽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흘려진 피’는 누구도 아닌 ‘신들을 위한 것’이라며 그는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다. 자기희생이 결국은 구원이 되리라는 믿음이다.
낱낱이 해체한 시적 언어들은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성, 고결한 영혼과 예술의 상실, 기득권의 타락을 꼬집는다. 제목에 등장하는 ‘피비린내가 눈을 떠나지 않아’는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 아이킬로스의 시행을 변형해 사용했던 문구에서 차용했고, 무대 위로 쏟아진 테스트는 에밀 치오라, 행보 등 예술가들의 대화와 글로 버무렸다.
그는 자신을 배우라고 말하지 않지만, 리델은 그 어떤 배우보다 뛰어난 메소드 연기의 화신이다. 이토록 긴 대사와 사색적 문장들은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낸다.그는 래퍼를 했다면 ‘쇼 미 더 머니’ 우승자도 떼놓은 당상이다. 한국어 욕까지 시원하게 내질렀으니 말이다.
안헬리카 리델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 [국립극장 제공]
“넘쳐나는 강렬함과 불균형 속에서, 내 안에서 인생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낀다. 이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폭발과 같다.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 수밖에 없는. 삶의 경계에 다다르면 인생이 더 이상 내 것 같지가 않다.”
거대한 검은소와 마주하고, 100kg에 달하는 소의 사체 두 구가 리델의 양쪽으로 내걸리면 무대는 거대한 굿판이 된다. 리델은 예술가가 아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간자였다. 산 것도 죽은 것도 모두 실물을 옮긴 무대는 제의의 영역으로 다가선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예술가의 광기 어린 자기파괴적 칼춤은 기묘하고 기괴하나 역설적 카타르시스로 돌아온다.
극의 후반부엔 자기혐오로 점철된 통렬한 독백이 이어진다. 이 예술가는 끝도 없는 자기혐오 위에서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는 학대와 파괴로 독창적 예술 세계를 구축해냈다. 권력의 타락과 부패, 본질을 잃은 예술, 진실을 잃은 삶의 모든 것을 공격하고 고발하는 모든 과정을 예술로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격한 무대를 휘감는 바흐의 ‘파사칼리아’, 헨델의 ‘사라방드’, 퍼셀의 ‘퀸 메리를 위한 장송곡’,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은 리델의 무대에 연극성을 더한다. 마지막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영화 ‘마더’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하는 통속적인 춤과 미소는 이 모든 여정이 안헬리카 리델이라는 예술가의 한판 살풀이이자 해원이었음을 일러준다.
연극은 꽤나 문제작이다. ‘20세 이상 관람가’에 ‘자해와 유혈이 표현된 작품이며 다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는 안내까지 고지됐음에도 일찌감치 매진을 기록했다. 한국 공연계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던 기이한 작품을 향한 관객의 넘치는 예술적 호기심이 확인됐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연출가의 작품인 만큼 지난 2~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이어진 공연엔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상당수 찾았다. 공연 이후엔 삼삼오오 모여 토론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공연 중 퇴장한 관객도 9명이나 됐으나 공연 후엔 기립박수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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