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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문사에 도착한 이 책을 받고는 ‘호주 시드니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인가?’ 했습니다. 제목이 ‘Sydney의 도반들’(맑은소리맑은나라 출판사)이거든요. ‘도반(道伴)’이란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란 뜻으로 주로 불교에서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길동무 즉 사람 이야기만이 아니었습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사찰 풍경을 담은 사진들과 지금은 골동품점에서나 만날 것 같은 엿장수 가위, 채, 주판, 하회탈 등 온갖 민속품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좀 당황스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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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이 책의 정체성은 뭐지?’ ‘저자는 누구지?’ 점점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후루룩 끝까지 책장을 넘겼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한 꼭지씩 정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책과 저자를 조금씩 알아가게 됐습니다.
기후 스님 '시드니의 도반들' 표지. /맑은소리맑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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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기후(基厚) 스님. 1943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해 1965년 범어사로 출가, 1969년 통도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통도사 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통도사,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강사를 역임한 분이었습니다. 용화사, 봉암사, 통도사 등의 선원에서 여러 차례 안거(安居)를 했으며 경주 기림사 북암에서바다이야기오리지널
는 6년간 묵언(默言) 정진한 적도 있으시더군요. 그리고 1991년부터 호주 포교를 시작해 1993년 시드니에 정법사를 창건했습니다. 2006년엔 위암 3기 진단을 받아 귀국했지만 수술만 받고 항암 치료는 따로 하지 않고 경북 봉화의 한 토굴에서 핸드폰도 없이 7년을 기도하며 병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병이 나은 후 2012년 다시 호주로 돌아가 현재 시드니소프트포럼 주식
정법사 회주(會主)로 계시다고 합니다. 책에 수록된 물건들은 스님이 호주 교민과 자녀들에게 한국 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수집한 옛 물건들입니다. 스님은 한 컨테이너 분량을 실어가 작은 전시장을 꾸몄는데 거기 전시된 물건들이라고 하고요.
책 내용은 사진이나 기물(器物)을 놓고 해설하듯, 설명하듯 써내려간 글입니다. 그런데 각각 글의 결론은 신천지게임 다운로드
모두 수행으로 연결됩니다.
호주 시드니 정법사 민속품 전시실. 스님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교민 노인들과 한국 문화를 알고 싶어하는 현지인들을 위해 컨테이너 1대 분량의 민속품을 가져가 전시실을 만들었다. /맑은소리맑은나라
호주 시드니 정법사 민속품 전시실 내부. /맑은소리맑은나라
#무풍한송
가령 제일 앞에 수록된 ‘무풍한송(舞風寒松)’. 무풍한송은 소나무가 멋진 통도사 입구 길이지요. 사진 속에는 스님 두 분이 그 길 가운데 서 있습니다. 글은 이렇습니다.
“고통의 짐은 여울물로 실어내고 번민의 정은 솔바람에 날린다. 그 길을 걷다가 만난 두 그림자. 덕수(德修)와 기후(基厚)다. 둘은 지금까지도 가끔 통화한다. 걷던 길을 멈추기 전에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때가 언제일까? 토끼뿔, 거북털이로다.”
토끼뿔, 거북털은 현실에 없는 것들이지요.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고(故) 월주 스님(1935~2021)이 회고록 제목으로도 사용한 것이 ‘토끼뿔 거북털’이었습니다. 도반이 보고 싶지만 쉽게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행자실 툇마루
1968년 통도사 보광전 행자실 툇마루에 앉아서 촬영한 스님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진에 대해서는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68년도이니 따진다면 57년 전의 모습이다. 그 시공(時空)에 대해 귀동냥해온 풍월(風月)로 읊조려 본다. 일념 속의 그림자 넌 누구인가? 그게 ‘나’라며 미소 짓는다. 그게 사실일까? 관념과 그림자, 그 둘이 합세해서 참나를 놀린다. 종이나 그림. 생각에도 떠나 있는 나, 그 나를 보광(지혜 광명)에서 만나고 보광전에서 헤어진다.”
#해인사 느낌
스님은 해인사 승가대학 강사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엔 절마다 기운과 풍습이 많이 달랐는데, 해인사는 군대 같은 느낌으로 유명했다지요. 기후 스님은 이렇게 표현했네요.
“통도사 서운암에 살면서 해인사에 가서 1년을 강사를 지낸 적이 있었다. 어중간한 사람이 어중간한 처신을 한 것이다. 그곳엔 성철 스님을 비롯한 혜암, 일타, 종진 스님 등등 고명한 스님들이 많이 계셨다. 가야산은 칼칼했다. 철스님(성철 스님)의 법력과 대장경의 위용이 선객(禪客)과 학인(學人)들의 자긍심을 한껏 끌어올렸다. 홍류동의 물소리를 업고 너울너울 춤을 추던 가야산의 천년 노송. 그 솔바람의 기운이 지금도 뒷골에 안개처럼 어려 있다.”
‘어중간한 사람이 어중간한 처신을 했다’는 구절에선 스님의 겸손을 엿볼 수 있네요. ‘가야산은 칼칼했다’는 표현에선 해인사의 가풍이 그대로 느껴지고요.
#리어카에 쌀 싣고
‘보광전 공양주’란 글과 사진은 재미있습니다. 통도사 금강계단(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 앞에 리어카가 한 대 서 있고, 리어카 안에 두 소년, 밖에 청년 한 명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설명을 보면 서 있는 이는 기후 스님이며 세 사람은 모두 행자입니다. 기후 스님이 보광전 선원에서 공양주(식사 담당)를 맡고 있던 어느 날 큰절에 쌀을 실으러 가다가 금강계단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라고 하네요. 그때는 선원과 강원은 딴 살림을 살아서 쌀은 큰절에 가서 받아왔는데 가는 길에 사찰 전담 사진사를 만나서 엉겁결에 한 컷 찍게 됐다고 하지요. 이 사진을 놓고 스님은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난 공양주를 3년이나 했으나 밥을 잘하진 못했다. 글 욕심 때문이었다. 밥이 잘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1. 쌀이 적당히 불어야 되고 2. 물이 적정할 것이며 3. 불기운이 한결같아야(장작은 위험) 4. 뜸 드는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지혜로운 인생에 흡족한 조건은? 석녀(石女)가 생남(生男)하면 그때야 말하리라.”
#맷돌
맷돌 사진을 놓고는 두부를 떠올립니다. 당시엔 절에서 직접 맷돌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었으니까 맷돌을 보면 저절로 두부가 연상된 것이지요.
“70년대 초엔 그(두부) 반찬이 나오면 학인들이 춤을 췄고, 김까지 더해지면 깨춤이 나왔다. 지금은 현금 공양이 제일이란다.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요, 육도(六道)가 아수라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대고 있는 작금의 사회 현상. 콩죽 같은 땀이 흐른다.”
#채
채에 대해서는 가짜와 진짜를 가리는 채를 상상합니다.
“걸러내는 물건이다. 진짜와 가짜를 단번에 가름하고 가는 것과 거친 것을 쉽게 골라낸다. 진짜와 가짜를 그렇게 쉽고 분명하게 골라내듯이 사기꾼과 거짓말쟁이를 한눈에 알아채는 인간 채는 없을까? 욕심과 허세를 줄여라. 그 속에서 인간 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드니 정법사 민속품 전시실에 전시된 '풀솔'. 스님은 풀솔을 보면서 눈이 쌓이면 방안에서 스님들도 바느질 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맑은소리맑은나라
#풀솔
삼베나 무명, 명주실을 짜기 전에 실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도구인 풀솔을 보면서는 바느질을 연상하지요.
“승려들도 그때엔 바느질을 잘했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진 오대산 상원사. 그땐 바깥출입을 전혀 못한다. 바느질할 절호의 찬스다. 지대방에서 너도나도 바느질을 한다. 주로 윗도리나 누비 두루마기가 그 대상이다. 바늘 끝이 뾰족해서 일념이 잘된다. 어머니의 공력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때의 강원도 눈보라가 그립다.”
시드니 정법사 민속품 전시실 '절 뒤주'. 쌀을 보관하던 뒤주를 보면서 기후 스님은 '쌀 한 톨에 땀 일곱 근이 담겼다'는 의미를 되새긴다. /맑은소리맑은나라
#절 뒤주
쌀을 담는 뒤주 사진을 놓고는 현재 불교의 세태를 날카롭게 꼬집네요.
“한 홉으로 쌀의 양과 승려들의 숫자를 체크하고 누룽지가 생기게 되면 공양주는 밥을 굶어야 했을 때였다. 춥고 배고픈 시절에 도인(道人)이 나온다. 냉커피와 두리안 향기를 찾고 메이커 있는 신발을 신고 다니면 도심(道心)은 땅에 떨어진다. 일미칠근(一米七斤·쌀 한 톨에 일곱 근의 땀이 배어있다는 뜻)이라. 쌀 한 톨의 무게가 일곱 근이라. 생명을 존중할 때 도도 깊어진다.”
#주판
주판도 요즘엔 귀한 물건이지요.
“계산기이다. 장사를 잘하려면 주판알을 잘 튕겨야 된다고 했다. 계산을 잘해야 된다는 뜻이리라.(…) 불가(佛家)의 선원(禪院)에선 어떠한가? 계산을 잘하면 지옥에 떨어질 확률이 많단다. 종일수타보(終日數他寶)에 자무반전분(自無半錢分)이다. 온종일 남의 돈 세어주는 은행 직원처럼 자기 월급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기 마음 살림 계산을 잘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기후 스님이 1981년 통도사 서운암에 살던 시절 촬영한 가족 사진. 그는 "출가 후 '어머니'라고 부른 횟수가 채 열 손가락을 못 넘긴다"고 했다. /맑은소리맑은나라
#가족 사진
‘어무이와 어머니’란 제목의 글은 속가(俗家)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습니다. 수록된 사진은 1981년 통도사 서운암에 머물던 시절 부모님과 함께 촬영한 것. ‘어머니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이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는 어무이요, 삭발하고는 어머니라고 불렀다. 어머니라고 부른 횟수가 채 열 손가락을 못 넘긴다”고 적었습니다.
기후 스님이 6년 간 묵언 수행한 경주 기림사 북암 앞에서 촬영했다. 스님은 "이곳에서 세 사람이 6년 동안 묵언을 하면서 지냈다. 84년도에 시작해서 89년에 그곳에서 나왔다"고 했다. /맑은소리맑은나라
#6년 묵언 수행
구체적인 수행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수행했는지는 6년 묵언 이야기에 살짝 풀어놓습니다. 스님은 경주 기림사 북암에서 6년간 묵언 정진했지요.
“말길 닫고 발길도 끊으면서 한곳에서 명상함은 마음길을 편안하게 왕래하기 위함이니 그 길을 걷는 이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나’이다. ‘그 나는 또 누구인가?’ 정좌하고 숨 고르며 그 나를 찾아본다.
1년, 2년, 3,4,5년 그리고 6년. 어렴풋이 그 나의 정체가 그러난다. 모두가 가짜였다. 찾는 나도, 찾을 나도...
도적을 아들로 잘못 알고 정성껏 키워 왔으니 안살림은 거덜이 나고 말았다. 이른바 인적위자(認賊爲子)다.
거지의 삶은 춥고 배고프다. 그들은 중생이라고 부른다. 진짜와 가짜는 둘이 아니다. 가짜가 진짜로 외투를 훔쳐 입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 가짜가 사라지니 가정에 평화와 화목이 맴돌고 사는 것이 나날이 즐겁다. 이른바 보살의 세계다. 쌀을 퍼내는 도둑이 사라지고 참나가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근원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원래 없는 나를 앞세우고 그 위에 또다시 분칠을 하려 든다. 코를 세우고 눈에 주름을 만들고 보톡스 주사를 맞는다. 그럴수록 속은 더 허전해진다. 무상의 진리를 이기지 못해서이다.
허세에 속지 말고 명상과 친해보자. 곳곳마다 웃음이요, 일일마다 행복이다."
#하심
책을 읽고 기후 스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스님은 “영어를 잘하시느냐”는 질문에 “지금도 못 한다”고 했습니다. 호주로 건너간 이유에 대해서는 “관광을 갔다가 신도들이 ‘절은 있는데 스님이 안 계신 지 7개월째’라는 하소연을 듣고 ‘여기 와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눌러앉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불광사와 달마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스님이 시드니에 정착해 두 절을 합쳐 정법사로 창건했다고 합니다. 옛 물건들을 가져간 이유는 “교민 할머니들이 고향을 너무나 그리워하는 것을 보고 그분들이 손수 다루었던 장독, 베틀, 맷돌 같은 물건을 보면서 위로를 삼았으면 해서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내가 한국에서 수행 잘하고 지명도가 있었으면 이렇게 못 나왔을 것”이라며 겸손해했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독특한 책입니다. 사진으로 보는 노승(老僧)의 수행담으로도 볼 수 있고, 지금은 잊힌 50~60년 전 사찰 풍경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자꾸 여기저기 들춰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의 책입니다.
종교가 가진 천(千)의 얼굴을 찾아가는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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