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마다 열리는 쇼팽 콩쿠르 우승자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마르타 아르헤리치까지 거장 피아니스트가 탄생하며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굵직한 계보를 써왔다. 조성진도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우승해 글로벌 스타가 됐다.
지난 10월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열린 폴란드 바르샤바. 3주간 84명의 본선 진출자가 ‘최후의 1인’이 되기 위해 경쟁했다. 그중 에릭 루(27)가 있었다. 2018년 리즈 콩쿠르 우승자인 ‘경력직’이 계급장을 떼고 출전했다. 10년 전 쇼팽 콩쿠르에서는 4위로 입상했었다. 187
사이다쿨 ㎝의 훤칠한 키에 유난히 마른 몸, 손가락 부상과 독한 감기까지 걸렸다. ‘콩쿠르 재수생’ 꼬리표를 달고 그야말로 사투를 벌이는 듯했다. 그는 버텼고, 끝내 우승했다. 그리고 말했다. “꿈을 이뤘다”고.
그로부터 한 달 뒤, 에릭 루를 서울에서 만났다. 지난 21일 서울 롯데콘서
바다이야기게임사이트 트홀에서 KBS교향악단과 협연한 그는 곧바로 울산, 통영, 서울 리사이틀을 열며 강행군 중이었다. 24일 서울 강남구 L7호텔에서 만난 그는 “너무 피곤해 보인다”는 첫마디에 “우승 후 쉬지 못했다. 식욕은 좀 찾았다”며 웃었다.
?‘도박’에 가까운 재도전
에릭 루는 조성진이 우승한 해 쇼팽 콩쿠르 최연소 참가자였다. 당
카카오야마토 시 17세였던 그는 4위 입상자로 이름을 알렸다. 3년 뒤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프로 연주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워너클래식스와 앨범을 발매했고 매니저도 있었다. 그런 그의 쇼팽 콩쿠르 재도전 결정은 ‘충격’이었다. 부모님은 물론 그가 한때 몸담았던 뉴잉글랜드음악원(NEC) 교수진도 걱정했을 정도다. NEC 피아노 학과장인 백혜선은 아르떼에 “실력으론
릴게임황금성 에릭 루가 1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만약 우승하지 못하면 비참해질지 몰라 걱정이 컸다”고 했다.
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시간’에 운명을 걸었다. 실력으로는 이미 우승권이지만 무대는 콩쿠르였다. 운도 체력도 따라야 했다. 재수생은 심사위원들의 기대치가 훨씬
바다이야기게임 높아 우승한 전례가 없다. 잃을 게 많아 보이는 이 경쟁에 뛰어든 것 자체가 ‘도박’이었다는 얘기다.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엔 ‘이제 마지막 콩쿠르구나’ 싶었어요. 아시아계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생각보다 너무 제한적이었죠. 지난 20년간 리즈 콩쿠르 우승자 중에서도 김선욱을 제외하면 (무대 기회가) 없어요. 마케팅이나 매니지먼트 등 음악 외적 요인도 큰 영향을 미치더군요. 코로나 때 경력이 거의 2년간 멈춘 것도 컸고요. 쇼팽 콩쿠르는 갈증을 해결할 유일한 기회였어요.”
루는 실력만큼 야망도 컸다.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승을 못 해도 결국 잘된 사례들이 있잖아요. 쇼팽 콩쿠르는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보는 콩쿠르라 결과가 어떻든 큰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조성진의 응원, 그리고 나의 바흐
경력직 재수생에게도 3주의 여정은 혹독했다. 잠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의 스승이자 콩쿠르 심사위원이었던 당 타이 손과 로버트 맥도널드도 기권을 권했을 정도. 그는 “본선 3라운드 직전엔 포기할까 고민할 정도로 힘들었다”며 “그래도 인내한 건 포기하면 더 안 좋은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아서”라고 털어놨다.
루를 버티게 한 요인 중엔 조성진도 있었다. “본선 2라운드 전에 조성진이 바르샤바로 와서 응원해줬어요.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됐죠. 우승 뒤엔 베를린필과 데뷔 공연할 때도 와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조성진은 루의 우승 직후 “네가 자랑스럽다”는 글을 SNS에 남겼다. ‘콩쿠르 동기’ 조성진은 루의 간절함을 이해했다. 극한의 여정에 도전한 동료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우승 뒤 찾아온 안도감을 느낀 것도 잠시, 그는 빡빡한 공연 일정에 돌입했다. 폴란드,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미국을 거쳐 한국에 온 그는 다음달 20일쯤에야 대만에서 짧은 휴가를 보낼 계획이다.
그는 한국에서의 첫 협연 무대(21일)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결선에서 연주해 우승을 안겨준 곡이다. 협연에 이어 22~26일에는 쇼팽의 곡들로 리사이틀 무대를 열었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연주할 때 책임감과 압박감이 더 느껴집니다. 한 달간의 압박을 이겨내며 마음의 두께가 생겼는데, 그 마음이 변치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무대 위의 모든 것은 여정(journey)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순수하게 음악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깊게 탐구하고 싶은 작곡가를 묻자 그는 1초 만에 답했다. “바흐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죠. 지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끝없이 탐구할 수 있어요. 평생 공부할 것 같아요.”
루는 한국과도 꽤 친숙하다. 조성진과 10년 전 쇼팽 우승자 콘서트로 한국 팬들과 만났고, 리즈 콩쿠르 이후에도 종종 국내 무대를 찾았다. 한국 음식으로는 특히 “찌개를 좋아한다”며 그중 “순두부찌개”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한국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뭘까.
“응원해주신 팬들이 많아요. 정말 큰 의미이고 힘이에요. 피아니스트로 산다는 건 꽤 힘들고 고된 삶이거든요. 진심을 다해 감사합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