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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춘(南萬春·32)의 이름이 조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아마 ‘개벽’ 잡지 제62호(1925년 8월)일 것이다. 거기에는 ‘러시아 거주 김생’이라는 익명의 필자가 쓴 ‘러시아인의 신임이 깊은 충직한 남만춘 동무’라는 글이 실려 있다. 특별 기획이었다. ‘밖에 있는 이 생각 ? 이역 풍상에 기체 안녕하신가’라는 제하에 국외에 망명 중인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기획 기사였다. 이동휘, 서재필, 유동렬, 이승만, 김규식, 노백린, 이시영, 안창호, 이동녕, 박은식, 신채호 등과 같이 저명한 망명자들과 나란히 남만춘을 소개했다.
촉망받는 조선 혁명의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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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남만춘은 조선 혁명을 위하여 피땀을 다해, 잠자고 밥 먹는 것까지 잊고서 분투하는 투사였다.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연구가 깊어서, 그 이론 수준이 조선인 중에서 제1위를 점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제 공산당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경력이 있는 거물급 인사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고려공산당창립준비위원회 책임자로 민박사
재직 중이었다. 성품도 좋았다. 일할 때는 진심을 다해 몰입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잠시라도 속이는 법이 없었다. 용모는 소박했다. 육체 노동자 같기도 하고, 순박한 농민 같기도 했다. 매력적인 인물이었다.1
이 기사가 실린 시기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비밀 결사의 맥락을 다소라도 짐작하는 잡지 독자라면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크다.양귀비예시
그해 4월17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로 인하여 남만춘이 거명되는 것임을 말이다. 그 대회가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에 남만춘의 남다른 기여가 있었다.
좋은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공산당 창립의 공로자인 남만춘을 가리켜 배신자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동료 사회주의자들이 그랬다. 조선주식투자초보
에서 맨 먼저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했고,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 이동휘가 1924년 12월27일에 쓴 편지가 있다. 국제당의 최고기관인 간부회 앞으로 보낸 공적인 문서였다. 거기에 남만춘에 대한 거센 비난이 담겨 있다.
“보이틴스키는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블라디보스톡 시에 머물렀습니다. 비밀리에 남만춘 동무를 불러서 40대재테크
대화를 가졌습니다. (…) 이 대화 이후에 남만춘 동무는 당 준비회 내에서 종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당 준비회 다른 위원들의 의심과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남만춘 동무는 점차 당 준비회 내에서 분쟁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2
남만춘이 비난받는 가장 큰 이유는 당 준비회 다른 위원들을 속인 점이었다. 당 준비회란 1924년 4월15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창립준비위원회의 약칭이었다. 국제당 간부회의 그해 2월 결정에 따라 조선의 통일된 공산당을 설립하기 위해 만든 준비기관이었다. 집행부를 구성하고 대회를 소집할 수 있는 큰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 기관은 대통합론을 조직 노선으로 삼았다. 국외와 조선 내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공산그룹을 망라한다는 원칙이었다.
조선 공산그룹 통합을 두고 갈린 노선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줄곧 국제당 동방부에서 차장, 부장직을 맡아온 보이틴스키. 출처 ‘코민테른과 조선’(모스크바, 연도 미상)
남만춘은 이 기관의 7명 집행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단지 간부일 뿐 아니라 가장 중책인 책임비서를 맡았다. 집행부는 상해당(상해파 공산당) 1명,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공산당) 3명, 내지 대표 3명으로 이뤄져 있었다.
상해당과 이시당, 두 공산그룹이 함께 집행부를 구성한 것은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1921~1923년 시기에 두 당은 치열하게 맞서 싸우던 사이였다. 그런데 1923년 10월에 이시당을 구성하던 옛 대한국민의회 지지 세력(국민의회파)이 민족통일전선 파트너를 누구로 상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떨어져 나간 뒤로, 두 공산그룹은 급속히 친밀해졌다. 두 그룹은 사안마다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 협력 체제는 당 준비회가 출범하기까지 6개월 동안에도 흔들림 없이 계속됐다. 그뿐인가. 당 준비회가 존재하던 전 시기에 걸쳐 두 그룹의 연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운동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꼽아도 좋을 놀라운 일이었다. 오직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바로 남만춘이었다. 그는 동지들과의 약속을 어겼다. 당 준비회 집행위원들은 자기가 속했던 분파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문제의 결정을 오직 당 준비회 회의 내에서 하겠노라고 약속했다.3 대외적으로 비밀 유지의 의무를 지니겠다고도 약속했다. 그러나 남만춘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남만춘은 국제당 동방부 차장 보이틴스키와 비밀리에 연락했다. 보이틴스키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서 그의 임지인 중국 상하이로 나갈 때, 그들의 은밀한 결합은 시작됐다. 이것이 바로 이동휘와 당 준비회 다른 간부들의 분노를 산 두 번째 이유였다.
보이틴스키는 당 준비회의 설립 근거인 국제당 1924년 2월 결정서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모든 공산그룹을 통합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조선 사회주의 운동을 이끄는 여러 그룹은 동등하지 않으며, 우열이 나뉘어 있다고 평가했다. 가장 우수한 공산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통합론’이었다.
국제당 간부회의 결정에 대해 동방부 임원인 보이틴스키는 승복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따르는 체했지만, 속으로는 자기 견해를 고집했다. 그는 조선 국내에 기반을 둔 공산그룹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내지당(중립당, 화요파) 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세우고자 했다.
1924년 12월에 보이틴스키의 구상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네트워크에는 그가 지휘하는 국제당 동방부의 당료들에 더하여 노령 당 준비회 책임비서 남만춘, 모스크바에 체재하는 국제공청 동방부 간부 조훈, 조선 국내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내지당 대표 김단야 등이 망라됐다. 이 네트워크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불과 4개월 만에 식민지 조선의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보이틴스키와 남만춘의 관계
남만춘이 보이틴스키에게 보낸 1924년 11월20일자 편지 첫 쪽. 출처 러시아사회정치사기록원
도대체 남만춘은 왜 당 준비회 집행위원 동료들의 기대를 저버렸을까. 당 준비회 책임비서의 지위에 있으면서, 자기 조직의 공식 입장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을까?
남만춘의 내면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924년 11월3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쓴 편지가 그것이다. 동료들의 비난을 받기 직전 시점이다. 수신인은 ‘친애하는 그리고리 동무’였다. 그즈음 국제당 동방부장에 재임 중이던 ‘그리고리 나우모비치 보이틴스키’를 가리킨다. 상하이에 체류 중이었다.
이 편지는 사적인 성격을 띠었다. 보낸 사람이 조선공산당창립준비위원회 책임비서이고, 받는 사람이 국제당 동방부장의 직위에 있는 사람인데도 그랬다. 남만춘은 편지 초입에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특별히 고독함을 느끼거나 일의 실패를 겪을 때, 자기는 보이틴스키에게 사적인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히 떠오른다고 토로했다. 사회주의 사업이나 당의 규율과는 무관한 남만춘 개인의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말이었다. “나는 당신이 내 상태를 이해해주고 내 입장에서 생각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썼다. 두 사람이 긴밀한 사적 교분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만춘의 속마음을 들어보자.
“지금 당신은 모스크바 아닌 곳에 체류하고 있고, 나는 조훈 동무로부터 모스크바에서의 우리 문제의 상황과 당신의 나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 들었습니다. 나는 정신의 활기를 느끼고 있으며, 여기서 나 혼자 견지하고 있는 노선이 옳다는 인식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 당 준비회의 저명한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낍니다.”4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만춘이 혼자 견지하고 있는 노선이 있다는 술회가 눈길을 끈다. 당 준비회 집행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료들과 공유하지 않는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달리 말하면 남만춘은 자각적이고 목적 의식적으로 자기 혼자만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남만춘이 연계 맺고 있는 네트워크에 관해서도 거론하고 있다. 상하이의 보이틴스키, 모스크바의 조훈, 블라디보스토크의 남만춘. 이렇게 삼각축이 형성돼 있었음을 본다. 도시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멀고도 먼 상태였음에 눈길이 간다. 여느 조건이라면 원거리 통신의 불편으로 결속력이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특별한 조건이 있었다. 결속력을 유지해주는 강력한 힘이 존재했다. 그게 뭔가? 바로 국제당 동방부 당료들의 일치된 후원이었다. 보이틴스키의 언행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제당 동방부에 속한 다수 당료의 견해와 의지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결속을 가능케 한 국제당 동방부의 후원
당 준비회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진술에 눈길이 간다. 당 준비회 규정이란 1924년 4월22일에 채택된 ‘고려공산당창립준비위원회 잠행규정’을 가리킨다. 제9항은 모든 결정을 가능한 조건이라면 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채택한다고 명시했다. 제11항에서는 분파 회의 참석 금지를 규정하고, 제12항에서는 비밀 유지의 의무를 적어놓았다. 남만춘은 이 규정을 위배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활기를 느끼고 있고, 자기 노선의 옳음을 확신한다고 술회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在露領 金生, ‘露人의 信任이 깁흔 忠直一方의 南萬春 동무(露名빠벨)’, 개벽 62, 1925년 8월1일, 36쪽.
2. Ли-Донхый(이동휘), Президиуму Исполкома Коминтерна(국제당집행위 간부회 앞), 1924년 12월27일, с.2,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96 л.130-133об.
3. Полномочия и задачи по созыву учредительного съезда ККП (고려공산당창립대회 소집에 관한 권한과 과제), 1924년 4월22일, с.4,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94 л.9-12.
4. Намманчун(남만춘), дорогой тов.Григорий(친애하는 그리고리 동무), 1924년 11월20일, с.1-3,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94 л.111об-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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