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이비치~갭파크 클리프워크 10km
다이아몬드만. 사진 왼쪽 아래에 보이는 문과 계단이 절벽 아래 낚시터로 이어지던 사진 명소였다.
영화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 영화 속 설정은 프랑스령 기아나인데 이 장면은 갭파크에 있는 절벽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계절의 착란이다. 그림자 속에는 겨
울이 남아 있는데 햇빛에는 여름이 담겼다. 온갖 인종과 피부색의 사람들이 모인 나라답게 계절도 섞였다. 태양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돈다. 세상이 뒤집어진 것 같은 신비로운 감각. 시드니의 겨울이다.
겨울하면 역시 바다다. 바다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시드니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이 있다. 본다이Bondi비치다. 시드니 중심가에
서 333번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간다. 본다이는 선주민 언어로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란 뜻이다. 그만큼 파도가 높고 드세다. 1km 남짓 뻗은 해변에서 현지인들은 서핑에 여념이 없고, 관광객은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사진 포인트는 아이스버그 수영 클럽.
해변을 따라 걷는다. 버스에서 내린 곳이 해변 최남단이라 북진한다. 일정한 간격
을 두고 여러 동판과 안내판들이 본다이의 역사를 품고 있다. 2017년에 국립 서핑 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거나, 본다이 서핑구조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60년 이상 연속 봉사하고 올해의 구조인상을 7번 수상한 피터 그레이엄이란 인물에 대한 헌사 등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건 상어방지 그물망을 겨우내 한시적으로 뗀다는 안내판. 최근 시드니는
환경단체들이 이 그물로 인해 다른 멸종위기 어종들이 잡혀 죽고, 상어방지 효과도 미미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시범적으로 3개 주요 해변에서 철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근 현지인 50대 서퍼가 상어한테 물려 죽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제동이 걸린 상태.
본다이비치 전경. 전
세계 서퍼들의 성지다. 겨울이라 사람이 그나마 좀 적은 편이다.
이왕 본다이를 남쪽에서 출발해 훑은 김에 북쪽으로 더 걸어 가보기로 했다. 사실 대부분의 가이드들은 본다이에서 출발해 남쪽 쿠지해변까지 걸어가는 코스탈 워크(해변길)를 추천한다. 아예 북쪽에 길이 있긴 하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청개구리 심보인지 모험심인지 모를 뭔가가 동한 김에 무턱대고 발이 닿는 대로 가봤다. 본다이 비치의 끄트머리를 돌았다. 다행히 길이 있었다. 클리프 워크(절벽길)란 이름이다.
본다이비치 북쪽 끝에서부터 클리프 워크가 시작된다.
이름에서부터 남쪽과 북쪽 각각의 길의 특징이 바로 드러난다. 쿠지로 가는 코스는 좀더 바다에 가깝게 붙는다. 그래서 좀더 아기자기한 해안걷기를 즐길 수 있는 반면 북쪽으로 가는 클리프 워크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절벽 위를 거닐며 짜릿한 고도감을 느낄 수 있다. 또 훨씬 한적하단 것도 큰 장점이다.
구관조에 오색앵무부터 전파천문학 신기원 연 안테나까지
비디갈biddigal 혹은 비지갈Bidjigal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공원을 관통하면서 절벽 위로 덥석덥석 올라탄다. 이곳 토착 선주민 부족의 이름이다. 이들은 1788년 영국에 의한 호주 개척이 처음 시작될 때 개척자들과 맞서 싸웠던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부족들은 절망적인 전력 차이에도 30년이나 항전했지만, 결국 스러지고 말았다. 특히 역병이 결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름은 공원으로나마 남아 이어지고 있다. 비록 작더라도.
이젠 군청색에 하얀색 글씨로 'Cliff walk, Bondi to Manly'라고 써진 이정표만 따르면 된다. 한국처럼 친절하고 빼곡하게 달아 두진 않았고 확실히 모퉁이를 돌 때 정도만 있다. 그러니 이따금 나오는 안내판에 있는 지도에 그려진 트랙 사진을 찍어두고, 이를 구글 지도와 번갈아 확인하며 길을 골라 가야 한다. 데크 같은 명백한 길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마을길이나 벙벙한 공원 지역을 지나가는 때가 훨씬 많다.
클리프 워크지만, 절벽만 따르진 않는다. 군데군데 마을길을 따라 한참 우회해야 한다.
본다이비치를 마지막으로 한눈에 꾹 눌러 담고 돌아선다. 기가 막힌 절벽을 기대하고 계단을 올라서는데 그냥 마을길이 주구장창 이어진다. 시선을 끄는 건 전봇대. 몇십 년은 더 전에 세웠을 법한 나무로 된 것과 최근 타설했는지 깨끗한 시멘트로 된 것이 번갈아 나타난다. 나중에 현지인에 물어보니 그게 호주가 일하는 방식이란다. 한 번에 새 것으로 일률교체하지 않고 쓰러지거나 문제가 생긴 것만 하나씩 공사한단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호주 구관조와 오색 앵무. 꽃에 고개를 박고 식사에 여념이 없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호주 구관조와 오색 앵무. 꽃에 고개를 박고 식사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새소리다. 똑똑하게 생긴 호주 구관조, 겁 없는 까마귀, 정신없이 꿀을 먹는 오색앵무 등이 길거리의 소음들 위로 음계를 한없이 쌓아올린다. 지루한 길에 이들의 소리를 몽롱하게 좇아가다보면 곧 롤리Raleigh다. 이제 좀 제대로 된 절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금방 깨졌다. 나무울타리에 이어 철조망이 바다 쪽 경관을 꽁꽁 봉쇄해 뒀다. 그 틈바구니로 조금은 보이지만 영 속시원하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무심하게 지나가면 안 된다. 울타리 너머 녹이 잔뜩 슨 안테나 하나가 꽤 기념비적이다. 1946년 이 안테나를 통해 우주에서 오는 전파를 관측하며 전파천문학이 새 기원을 열었다고 한다. 같은 곳에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전파망원경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시드니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
다이아몬드만 위아래 절벽 위에 늘어선 마을은 시드니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로 꼽힌다.
아직은 아스라하지만 멀리 절벽들의 위용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서둘러 걸음을 잇는다. 빨리 태즈먼 해의 파도가 절벽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길은 애석하게도 마을로 휙 꺾인다. 지도상으로는 더들리 페이지Dudley Page란 공터를 들러야 한다고 나온다. 그냥 무시하고 절벽을 향해 질러갈까 싶다가 한 번 내친걸음을 해본다.
가파른 절벽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안전난간을 넘어가면 안 되지만, 이를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놓쳤으면 후회할 전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시드니가 한눈에 가장 잘 보이는 장소라고 한다. 더들리 페이지는 부지의 소유자였던 사람의 이름으로, 그는 이곳의 전망이 너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이를 시에 기부하고 아무나 올 수 있도록 개방했다고 한다.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 시드니 타워가 또렷하다. 서서 보는 것보다는 돗자리를 펴고 누워서 잔디밭을 아래 배경으로 깔고 보는 것이 훨씬 멋있다.
더들리 페이지에서 바라본 시드니 전경.
이제부터 절벽지대다. 길이 미끄럽고 위험하니 주의하라는 경고판이 살벌하다. 하지만 울타리를 넘거나 괜한 객기만 부리지 않으면 길 자체가 위험한 경우는 없다. 바닥은 목재고 울타리는 철로 된 데크가 절벽 위를 종횡무진한다. 가격이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는 집들이 절벽 위 곳곳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모습이 매우 이국적이다. 이곳은 시드니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로 꼽힌다.
북쪽으로 움푹 파인 곳은 다이아몬드Diamond만이다. 보석이 드나드는 항구였을 것 같은데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이 일대를 소유했던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약간 김이 빠지지만 그래도 풍광만큼은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붉은 사암 절벽의 조화.
다이아몬드만의 옛 상징은 바위를 쌓고 절벽을 깎아 만든 계단과 암문이었다. 이곳은 옛 어부들이 절벽 아래 낚시터로 가려고 만든 시설로 인기 높은 사진 명소였다. 최근 이곳으로 접근하는 길을 모두 막았다. 관광객들이 무분별하게 인증사진을 찍다가 추락한 사망사고가 잇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빠삐용'이 뛰어내린 절벽
다이아몬드만의 절벽을 넘으면 이제 절반 이상 끝낸 것. 크리스틴공원 너머 맥쿼리등대를 이정표 삼아 따라가면 된다. 겉보기엔 평범한 하얀색 등대인데 이것이 호주에 최초로 세워진 등대이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1818년부터 등대가 있었고, 현재의 등대는 1883년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등대는 정상 작동 중이다.
등대를 지나면 사우스헤드 신호소. 약 200년 동안 사용된 통신시설이다. 폐쇄된 채 방치됐다가 2023년 리모델링한 유적지다. 다만 트레킹 중에는 건물 뒷면만 보고 지나가기에 둘러보려면 돌아나가야 한다. 바로 옆에 1892년 건설된 시그널 힐 포대는 잘 보인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포탄이 발사된 날짜가 1933년이라고 한다.
길 끝에서는 도로를 따라 갭Gap파크로 이어진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침식과 퇴적에 의해 절벽에 틈이 많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인기 명소인데 영화 '빠삐용' 촬영지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뛰어내린 곳이 바로 이곳의 절벽이다.
갭 파크 호주 무화과나무. 뿌리에서 장엄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우리는 더 웅장한 절벽을 충분히 봤다. 살짝만 들여다보고 숲길로 들어선다. 몇 걸음 채 내딛지 않았는데 가슴이 뻥 뚫릴 것처럼 시원하던 절벽 트레킹에서 삽시간에 깊은 정글 속으로 옮겨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질기고 장엄한 생명력을 보여 주는 호주 무화과나무들의 거대한 뿌리들이 이채롭다. 그리고 또 그 정글은 싱겁게 몇 걸음 가지 않아 끝나고 다시 도시다. 시드니는 어느덧 노을로 물들고 있다.
info
노을이 지는 무렵이면 페리를 타고 도심으로 돌아가는 걸 매우 추천한다. 이런 오페라하우스를 볼 수 있다.
시드니 도심에서 333번 버스를 타면 본다이비치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 333번 버스는 본다이비치 남쪽, 가운데, 북쪽에서 각각 정차하니 쿠지해변으로 가려면 북쪽에서 내리면 된다. 도착지인 갭 파크에서 시드니 도심으로 돌아오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324~325번 버스가 수시 운행하므로 이를 타면 되는데 문제는 배차간격. 30분에서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가 더러 있다. 이왕 기다릴 거면 페리를 타는 것도 추천한다. 특히 노을이 지는 무렵이면 환상적인 오페라하우스를 감상하며 숙소로 돌아갈 수 있다. 가격은 1인당 약 8,000원. 교통카드를 사용하면 되고, 현장 키오스크에서 편도 티켓을 발권해도 된다. 일찍 줄서서 2층, 왼쪽 자리를 점유하면 사진 찍기 용이하다. 화장실은 본다이비치에 하나, 크리스틴공원에 하나 있다.
지도 Alltrails.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