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제본이 잘못된 책처럼 온몸을 헐고 다가온다 헌 데를 노랗게 덮고, 낡은 책장 넘기는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통조림 따개로 가슴을 따고 들어온다 어느새 저 노란 것들과 뒹구는 가을은 뻥 뚫린 통조림 구멍이다// 열어 젖혀진 통조림 뚜껑에 때늦은 빨간 꽃이 핀다 가을이 희미하게 흘리는 웃음이다 아니다 가을 헌 데 앉은 상처딱지다 아, 예뻐! 애인이 무자비하게 꺾어 코카콜라 병에 꽂는다 애인은// 인쇄소의 식자처럼 단정하고 가을에 태어났다 그러나 한번도 온몸을 헐고 내게 다가온 적이 없다 헌 데가 없는 나는 빨간 꽃이 피지 않는다 견고하고 노란 저것들처럼 뒹굴거나 팔랑 온몸 펼쳐본 적도 없다 한 번도 릴게임황금성 펼쳐진 적 없는 오래된,// 구겨진 몸을 어떻게 펴야 하는지 모르는 나는 다만 가을과 노숙할 뿐이다 신문지 아래 노란 옷소매 드러낸 저것들과, 내일 아침이면 서리 하얗게 뒤덮일 저것들과,
『비열한 거리』(2003, 작가콜로퀴엄)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 시클롭스키가 말했듯 "예술의 목적은 사물을 낯설게 하여, 우리가 그 릴게임황금성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익숙한 사물과 언어에 무감각해 있다. 시가 하는 일은 그 익숙함의 껍질을 깨고, '당연한 것'들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시는 정보가 아니라 감각과 사유의 진동이다. 박미영(1963~, 대구 출생)의 「저것들과 함께」는 기존 서정시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낯설기 하기'로 읽힌다. 바다이야기하는법
「비열한 거리」속에 쓰인 "말"의 세 가지 심층 의미는 시인의 언어 조탁에 대한 치열한 고뇌의 산물이다. "말"은 현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한 시어로서의 말(言), 달리는 말(馬), 끝말(末)의 다의적 의미로 부려 썼다. 1연의 첫행 "가을은 제본이 잘못된 책처럼 온몸을 헐고 다가온다"를 보라. 한국 현대시 속에 누가 '가을'을 "제본이 릴게임몰메가 잘못된 책처럼"의 이미지로 형상화하였던가. 그리고 가을이 주는 고독한 상실감을, "온몸을 헐고"라는 전혀 '낯선' 은유로 찔렀다. 이 낯섬은 "날카로운 통조림 따개로 가슴을 따고" 울림의 진폭을 확장한다. 적확한 리얼리티야말로 생생한 이미지와 겹쳐 도발적 참신성을 가져왔다.
예측불허의 시구를, 곧바로 끌어들이는 그녀의 솜씨는 예사롭지 바다이야기고래출현 않다. 왜 시인은 "가을은 뻥 뚫린 통조림 구멍이다"라고 했을까. 2연 첫 행을 보라. "열어 젖혀진 통조림 뚜껑에 때늦은 빨간 꽃이" 피기 때문이다. 추측건대 "가을 헌 데 앉은 상처 딱지"는, 이별의 환유다. 왜 애인은 예쁘고 고운 꽃병에 '꽃'을 꽂지 않고 흔한 코카콜라 병에 '꽃'을 꽂았을까. 가장 귀하게 여긴 '꽃'을 그 병에 꽂음으로써, 놀라운 시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노숙"은 고독한 자아를 가을 속에 중첩시켰으며, 소멸을 인간의 허무 의식에 닿게 하였다. 하여, 박미영의 시적 통찰은 '낯섬'을 통해 공간과 깊이를 얻었다.
김동원 (시인·평론가) 기자 admin@slotmega.info